365일 내내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가 지속되고 하늘에는 언제나 태양과 달이 함께 떠 있으며 그 밑으로는 광활한 백야가 펼쳐져 있는 신이 사는 세계, 신계(神界). 이 곳에서 신은 오늘도 백야 위에 양반다리로 앉은 체 눈을 감고 부단하고 무한한 삶 속에서 느껴지는 따분함을 조금이라도 지우기 위해 우주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
앞서 말했듯이 그는 신이다. 눈을 감기만 해도 자연계와 요정계, 정령계 그리고 환상계는 물론이고 천계와 마계, 영계 따위를 가릴 것 없이 전우주의 말과 행동이 자신의 눈과 귀에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온다. 신이 이것을 처음 깨달았을 땐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심심할때마다 계속 그 행위를 반복했지만 이마저도 자신의 존재를 망각하고도 남을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이제는 즐겁다는 기분은 들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혼자서 듣고 있기만 하다보니 '고독'이란 새로운 감정이 몇천년 전부터 느껴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은 체 신은 조용히 생각한다. '차라리 내가 신이 아닌 그저 피조물의 존재였다면 이러한 걱정은 하지 않고 한순간 살다가 조용히 사라지겠지' 라고.. 그때 오랫동안 굳게 닫혀 있던 신의 눈이 한순간 반짝거렸다.
"그렇다면 그렇게 하면 되지 않겠는가!"
신은 앉은 자리에서 껑충 뛰어오르듯 일어서며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멋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을 것이라며 뿌듯해 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것을 착수하기 위해 바로 정신감응을 통해 천계와 마계에 있는 천신과 마신을 신계로 불러 모았다.
자신이 비록 만물을 창조하고, 그 우주 어느 누구도 거들떠 보지 못하는 '신'이라는 거대하고 거룩한 존재이긴 하지만(쑥스럽다) 이런 전 우주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엄청나다 못해 기절초풍할 계획은 혼자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은 사실 좀 어렵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해도 되겠는가?' 라고 조언을 구하고 싶기에 그들을 부르는 것이다.
어쨋든 그렇게 되서 신의 호출을 받고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신계로 도착한 천신과 마신. 하지만 그들은 그 자리가 어색하다 못해 매우 불쾌했다. 그 이유는 바로 벌써 자신들의 자리가 3번쯤은 바뀌고도 남았을 긴 세월동안 아무런 연락도 없던 신께서 갑자기 자신들을 부른 것도 모자라서, 세상에서 가장 싫은 놈과 함께 불려왔다는 것 때문이다.
"그래서 저희들을 부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내심 없고 성깔 더럽기로는 마계에서 뿐만 아니라 천계로까지 그 소문이 자자한 마신이 신이 말하기 전에 먼저 알 수 없는 신의 생각을 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천신은 그의 행동이 너무 못마땅스러웠지만 신의 앞에서 태클을 걸 수도 없기에 그저 혀만 끌끌 찼다.
"으음.."
신은 자신을 향해 바라보는 천신과 마신을 세워놓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매우 멋지고 아름다운 계획을 세운 것은 좋았으나 막상 그들이 눈 앞에 있으니 쉽게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대로 그들을 보낸다면 자신은 최소 몇천년 아니 몇만년을 또 다시 그 전처럼 그저 할 일 없이 세월아 네월아 하며 지낼지 모른다.
그리고 무언의 각오를 다진 신은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나는 잠시 다른 세계로 내려가고 싶다."
신은 조금도 꾸미지도, 둘러대지도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신의 전후무후할만한 말에 천신과 마신은 기가막히다 못해 어안이 벙벙해졌고, 신계 전체는 한순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꿀꺽!
신은 태어나서 그렇게까지 긴장해본 적이 없었다.
"하하하하하하하!"
그리고 무거운 정적을 깬 것은 다름아닌 마신이었다. 그는 신계 전체가 흔들릴 만큼 호쾌하게 웃었다. 신은 가끔 생각한다. '마신, 저 놈은 무서워' 라고..
"크흐흐.. 시, 신께서 흐흐.. 그런 생각을 하실 줄은.. 흐흐흐!"
신의 지금의 바램은 사실 마신의 바램이기도 했다.
'천신과 같이 생각이 꽉 막힌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설마 신께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게셨을 줄이야.. 이거 혹시 잘하면?'
이것은 마신에게 있어서 몸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절대적인 기회였다. 마신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또 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꾹꾹 참았다. 하지만 천신이 있는 한, 결코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안됍니다!!"
마신의 예상대로 천신은 신을 향해 거세게 반발했다. 그의 차분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는 신계를 울리고, 신마저도 놀라서 움찔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기만 하더구만!"
하지만 신은 이에 질세라 더욱 더 강하게 대항했다. 이미 신은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음을 알고 절대로 해내고 만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기에 뒷걸음칠 생각따윈 전혀 없었다.
"............."
천신은 이렇게 나오면 신도 적당히 떼쓰고 포기할 줄 알았지만 신의 뜻밖의 행동에 놀라 당황스러워 입이 떡 벌어진 체로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리고 천신의 빈틈을 놓칠 마신이 아니었다.
"이봐 천신, 신님께서도 지금까지 일만 해오셨으니 이제는 쉬실 때도 있어야지.."
신은 감동하고 만다. 지금까지 이렇게 착한 녀석을 멋대로 오해하고 있었다니.. 신은 감정이 북받쳐 올라 마신에게 엄지를 든다. 마신도 신에게 엄지를 들으며 윙크를 살짝 날린다.
"그래! 천신아, 마신아.. 어차피 신계로 올 수 있는 것도 너희들 뿐이잖냐.. 너희들이 입 꾹다물고 있으면 예전처럼 아무런 문제도 걱정도 없지 않겠어?"
"그럼, 그럼."
"으으....."
마신 덕분에 자신감이 생기다 못해 넘쳐서 흐르는 신과 옆에서 끄덕이며 추임새를 붙여주는 마신의 맹공에 천신은 하는 수 없이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후우.. 좋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느 세계로 갈 생각이십니까?"
'좋았어!'
'OK. 흐흐...'
신과 마신, 둘은 당장이라도 하이파이브를 할 기세로 무진장 기뻐한다.
"으음.. 전부터 생각해왔지만 자연계는 너무 딱딱하고 요정계나 정령계는 너무 부드러워. 음.. 내 취향엔 역시 환상계가 좋아."
환상계, 그 곳은 엘프나 드래곤, 드워프 등의 상상의 종족들과 검과 마법이 등장하는 세계.. 환상계는 가끔 자신들이 말하길 '소드마스터'나 '그랜드마스터' 라는 자들이 죽어서 영계에 도착했을 때 '다시 보내줘!' 라며 난동 피울 때면 환생이나 염라대왕의 심판따위를 생각하지 않고 강제로 마계로 바이바이 해버린 화려한 경력들을 지금까지 꾸준히 쌓고 있기에 천신은 내심 걱정스러웠다.
'어디든 무슨 상관이냐? 빨리 자유로워지고 싶다!'
마신은 그저 즐겁기만 할 뿐이었다.
"으음.. 환상계.. 입니까. 그렇다면 언제쯤 가실 생각이신지?"
"응? 지금 가려고."
"에엣? 지금 바로요?!"
"나는 얼른 세상 구경을 해보고 싶구나."
"저, 저기 신님!"
기분좋게 기지개를 펴는 신을 마신은 '이때다' 싶어 제빨리 불러세웠다.
"저는 그저 옆에 붙어 있기만 해도 좋으니 같이 가면 안될까요?"
"마신, 자네 무슨 소리를 하는겐가!"
천신은 안그래도 신이 자리를 비우겠다는 소리에 지금도 그 충격이 가시질 않았는데 마신 또한 마계를 내팽겨치겠다는 소리에 뒷꼴이 당기기 시작했다.
"무슨 상관이냐! 마계나 천계나 어차피 아랫것들 시키니 우리가 할 일도 거의 없잖아!"
"뭐, 뭐?! 감히 신님 앞이라서 가만히 있었더니.. 무슨 망발을 지껄이는 거냣!"
"오냐, 이번 기회에 누가 더 강한지 한번 붙어보자!"
투닥투닥!
"마신아."
한참동안 세상이 멸망할 기세로 천신과 싸우던 마신을 신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고 왠지 모르게 따뜻한 기운이 도는 목소리로 불렀다.
"네, 신님!"
마신은 날아오는 천신의 드롭킥을 가볍게 흘려버리곤 신에게 다가섰다. 마신은 이제 드디어 이 더러운 족쇄에서 벗어나 이 몸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아, 드디어 해방이구나!
"남아있거라."
"에엣?!"
마신은 신을 도와 천신을 굴복시켰기에 당연히 '그렇게 하거라' 라는 답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건만 어떻게 이럴수가.. 잘못 들었겠지라는 생각에 신에게 되물어보지만..
"그거야.. 네가 없으면 마계 전체에 혼란과 공황에 빠져버리고 결국 반란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갑자기 바른 소리를 하는 신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지는 마신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몰래 마계에서 빠져나간다면 죽겠다는 걸로 알고 바로 찾아가마?"
그 말을 끝으로 신의 몸 주위에 푸른 빛이 감싸돌더니 순간 흩어지며 빛과 함께 신의 모습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 안돼! 신님!!!!!"
마신은 절규와 함께 좌절한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불쌍한 마음에 마신의 어깨를 토닥이는 천신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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